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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

한담해변 및 기타 - 제주여행 2일차

제주여행2일차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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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담해변 - 재홍각(중식) - 오설록 - 제주곶자왈 - 모슬포항 (방어구입) 
2일차 꽉찬일정을 보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올레길 걷기를 할것같다.

 

 

 

한담해변

 

 

 

해군호텔.

 

 

한담해변.  바닷물색이 정말 좋은곳이다.  아이들놀기에적당해보이고...

 

 

한담해안산책로
곽금올레길'이라고도 부르는 한담해안산책로는 
애월항에서 곽지과물해변까지 해안을 따라서 조성된 산책로이다.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아름답다. 
총 길이는 1.2km이며, 바로 옆에 파도가 첨벙거리는 해안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 
 '제주시의 숨은 비경' 31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용암이 굳어지면서 만들어진 다양한 신기한 형태의 바위들이 시선을 끌고, 
검은 바위로 이루어진 해안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길은 산책 길에 재미를 더해준다.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아름다운 일몰을 잘 감상할 수 있다는 점도 이곳의 매력 포인트다.

 

 

제주도에서 흔히보는 화산폭발흔적들....

 

 

오설록으로 이동했다.

 

제주 오설록
아모레퍼시픽 그룹의 계열사로 녹차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이 회사에서 제조하는 녹차 브랜드의 이름이기도 하다.
오설록이란 이름은 '눈 속에서도 피어나는 녹차의 생명력에 대한 감탄의 표현'과
 ‘origin of sulloc’, 즉 이곳이 설록차의 고향이란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길거리가다가 점심을 해결한곳  재흥각.

맛있다.

 

 

식사후 곶자왈 탐방을 한다.

 

 

곶자왈이란?
곶자왈은 화산활동 중 분출한 용암류가 만들어낸 불규칙한 암괴지대로 
숲과 덤불 등 다양한 식생을 이루는 곳을 말하며, 
‘곶’과 ‘자왈’의 합성 어인 제주어이다. 
즉 곶자왈이란 암괴들이 불규칙하게 널려있는 지대에 형성된 숲으로, 
다양한 동·식물이 공존하며 독특한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

곶자왈이 제주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과거 경작이 불가능하여 개발로부터 격리되어 버려진 땅으로 존재하였지만, 
환경의 가치가 더욱 중요시 되고 있는 현재는 오히려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자연자원과 생태계의 보전가치가 높은 지역이 되었다.

곶자왈 용암지대는 토양의 발달이 빈약하고 표층은 물론 심층까지도 
크고 작은 암괴들로 이루어져 식물이 자라기에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식생의 발달속도가 느려 지금과 같은 숲이 형성되는 시기가 오랫동안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추사김정희선생 유배지를 구경한다.

 

김정희 유배지 사적
추사 김정희는 시,서,화 분야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예술가이다. 
헌종 6년 (1840년) 55세 되던 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로 유배되어 
헌종 14년(1848)까지 약 9년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유배 초기에는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이곳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 왔다.
이곳에서 살면서 제주 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제주 지역의 학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차를 매우 좋아한 김정희는 다도의 대가인 초의 선사와 평생 우정을 나누었으며 
제주 지역에 차 문화를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김정희는 추사체를 완성하고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를 비롯하여 많은 서화를 남겼다. 
이곳은 집터만 남아 경작지로 이용되다가 1984년에 강도순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되었다. 
2010년에 세워진 추사관에는 김정희와 관련한 역사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추사의 세계
추사의 글씨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은 송설체와 석봉체를, 조부인 김이주는 동국진체를 잘 쓰는 등 
월성위 가문은 대대로 명필가 집안으로 이름났다. 
추사 역시 그 후예로서 초년에는 단정하고 전아한 멋이 깃들어 있었다.
연행뒤 추사의 글씨는 중국 청나라의 서예 사조가 그대로 나타났다. 
그는 스승 옹방강의 가르침에따라 고대 금석문의 글씨들을 연구하면서 
강한 골격과 획법을 더해갔는데 너무 기름지고 획에 골기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추사는 이런 한계를 제주 유배라는 극한 상황 속 자기 수양으로 극복해냈다. 
그는 고졸한 중국 전한시대의 글씨들을 열심히 옮겨 쓰면서 확고한 자기 틀과 형식을 갖춰나갔다. 
이로써 탄생한 것이 바로 추사체로 전한 시대 예서체의 멋과 정신을 곁들이면서도 
개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두고 박규수(1807~1876)는 " 구속받고 본뜨는경향없이 
대가의 장점들을 일가를 모아 스스로 이루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예술적으로 더욱 완숙해진 과천 시절에 이르러서 
추사체는 변화무쌍함과 괴이함에 그치지 않고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추사와 동시대를 살았던 문인 유최진(1791~1869)은 
「추사 글씨 편액에 부쳐」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모슬포항.  이곳에서 방어회를 산다

여행은 선물이다.
나는 오늘
바람 부는 대로 간다.
-나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