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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해외여행

까하마르카 - 비극의 잉카역사가 시작된곳

4/6 (목)

 

까하마르카로 이동



리마에서 까하마르카로 넘어가는일정.
오후 3시 비행기라서 리마에서 별다른 일정은 잡지않았고, 일찍 일어나서 근처 바닷가로 산책할까 했는데

일행중 한명이 몸상태가 안좋고, raintree도 블로그 정리, 짐 정리등 때문에 여유있게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패키지여행이었으면, 아침 7시 출발입니다. 식사는 6시부터 가능하고, 모닝콜은 5시반에 나갈겁니다등... 빡센일정이었을텐데

자유여행이라서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일정을 변경할수있다. 


어제 포구 어시장에서 산 전복을  회로 만들어 김, 깻잎, 미소 된장국등과 함께 반찬삼아 아침식사를 하고,

11시쯤 택시를 불러 공항까지 이동한다. 그런데 전북회는 국내산과 맛이 다르다...회로 한두점 먹다가 바로 삶아서 요리했다.


리마도착첫날 공항에서 올때는,  민박집에 픽업을 부탁하여 밴을 불렀는데 50달러를 지불했고, 

리마시내를 돌아다니면서 택시 운전기사와 이야기하는 도중 공항 픽업이 가능하다고 해서 가격을 확인해보니 20달러라고 한다.
민박집 픽업비용이 넘 비싸다. 안전에 대한 검증이 있다해도 민박집 픽업가격은 좀 낮추어야한다.


리마 북쪽지역은 얼마전 홍수가 크게발생해서 도로가 유실된후 복구가 잘 안되어 확인해보고 가야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한달전쯤 항공권을 예약해 놓았기에 일단 출발한다.


까하마르까에서는 에어비앤비로 4박 예정이고
에소님의 스페인어 전화 학습 선생인 페루의 현지인이 나와서, 까하마르카에서 5일간 관광안내를 해준다.
또한 뚜루히요까지 동행하고, 현지인 숙소에서 2박예정이다.


카하마르카에서  뚜루히요까지 그리고 리마까지 이동을 리무진버스로 할예정인데
얼마전(약 한달전) 홍수로 여러개의 다리가 유실되었다해서 걱정이다. 

약 한달정도 지났지만, 파손된 다리가 복구가 되었는지...도로상태가 가장관건이다.

==> 도로복구가 안된상태라서 버스가 끊겼고, 공항난민 신세로 전락하는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최상의 상태로 마무리되었다


패키지여행과 자유여행을 비교해보면
자유여행은 신경쓸일이 넘 많지만,  여행의 질은 더 나은것같다.
여행일정이 말 그대로 자유롭다.


패키지여행의 장점도 꽤크다.
신경쓸일이 없다. 유명하다는 장소는 거의 빠트리지않고 짧은 시간에 다 돌아볼수 있다.
비용은 저렴할수도, 더들어갈수도 있다.


리마에서 비행기로 1시간 좀 넘게 걸려 까하마르카에 도착.
택시를 잡아 타고 숙소로 향한다
숙소는 지은지 1년 정도된 콘도인데, 방 2개, 더블침대, 화장실 2개 그리고 그외 시설이 넘 훌륭하다.
보안은 철저하고, 걸어서 3~5분거리에 대형마트가 있다


마트의 가격은 대부분 착하고, 물건들의 신선도가 높다. 이것저것 적당히 장을보는데
 이지역이 해발 2,800m에 위치한  청정지역이라서 농수산물 제품의 궐리티가 좋은편이다.

콘도형숙소에서 칠레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소주처럼 즐긴다는 디아블로 와인에 소고기 스테이크, 밥, 과일, 등으로 저녁만찬을 즐겼다.
5성급호텔 만큼 편하고, 취사가 가능하며, 기타 세탁기등 시설이 수준급이다. - 숙소가 마음에 든다.

까하마르카의 첫날밤이 그렇게 지나간다.


페루저가항공 LCP



리마공항 라운지.



스페인어는 J 발음을 ㅎ으로 읽는다.  그래서 까하마르까가 된다.




페루 저가항공...하지만 나름 괜찮은편이다.



리마시내.





안데스산맥.









해발 2,800m에 위치한 까하마르까.

2,500m ~ 3,000m 고도에서 보통 고산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앞으로 가게될 도시는 3,000 ~ 4,000m 급 이라서 미리 까하마르까에서 사전 적응해본다




한때 잉카의 수도였던 도시라서 그런지... 전통복장의 페루인들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콘도 숙소.

마음에 든다. 와인잔에, 와인따개, 스테이크용 접시며, 포크&나이프등 여러면에서 잘 갖추어진 숙소다.

비용은 직접예약을 안해서 모르지만 1박에 10만원이 안넘는건 확실하다.




숙소에서 몇발자국만 나서면 전원풍경이 있다.




근처 대형마트에  장보러왔다.

 입구 정중앙에  LG와 삼성 제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반갑기도하고 뿌듯하기도하고....ㅎ



넘 잘먹고 다니는것 같아 걱정이다.

살쪄가며 여행하는거라 하는데....얼굴이 점점 동글동글해지면  카메라 앞에서기가 부담스럽다.





잉카 멸망의 역사와 까하마르까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Cajamarca, '까하(상자) 마르까(표시하다)'.

잉카 몰락의 전주곡을 울렸던 도시다.

까떼드랄 성당이 있고 바뇨스 델 잉카(잉카 온천)가 있다.
바뇨스 델 잉카는 잉카의 왕 아따알빠가 머물며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동생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온천수에서 몸을 풀고 쉬다가 스페인의 삐사로 군대가 음모를 꾸밀 시간을

마련해주어 결국 잉카가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서글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80도의 유황 온천수는 솟고 있고 그 옆에는 꽃도 피고 있다.  



1527년 잉카의 가장 위대한 황제인 와이나 까빡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잉카제국은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젊어서부터 일생을 정복전쟁에 매진했던 와이나 까빡 황제는 
당시 오늘날 에쿠아도르의 수도인

끼또에 머물고 있었는데 자신의 후계를 정하지않고 급작스럽게 죽음으로 황제를 따라 끼또에 머물고있던

끼또파와  잉카의 수도인 꾸스꼬파 간에 세력 다툼이 예상됐는데 끼또파에선 와이나 까빡 황제와

끼또족의 공주 사이에 낳은 아따왈빠를 내심 후계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를 눈치챈 꾸스꼬에 있던 와이나 까빡의 적자인 와스까르는 휘하의 장수들을 끼또로 보내

아따왈빠와 그 측근들을 정벌토록 명한다.

아따왈빠와 끼또에 머물던 신하들은 꾸스꼬로 돌아가거나 
꾸스꼬군에게 투항한다는건 곧 자신들의 권력의

상실과 죽음을 의미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와스까르가 군대를 보냈다는 소식을 들은 아따왈빠와 그 측근들은 내심 이런 사태를 기다렸음에 틀림없다.
이들은 선대 황제인 와이나 까빡을 따라 수십 년간 정복 전쟁에 나섰던 경험 많고 관록있는 최정예 잉카병사들이었다.


그러는 사이 꾸스꼬의 와스까르는 
와이나 까빡의 뒤를 이어 자신이 12대 황제로 등극하고 끼또군과 꾸스꼬군간의

첫번째 전투는 또메밤바 벌판에서 벌어졌는 역시 예상대로 꾸스꼬군은 잘 훈련되고 경험 많은 끼또군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첫 전투에서 자신이 보낸 군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와스까르는 곧 지원군을 보냈지만 이 지원군 역시

끼또군과의 전투에서 맥없이 패해버렸다.


대소 여러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아다왈빠는 와스까르가 있는 꾸스꼬를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고 와스까르는

꾸스꼬 인근 전역에 총 동원령을 내리고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데  끼또군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결국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사로잡혔다.

이때 아따왈빠는 온천 휴양도시인 까하마르까에 머물면서 후속 조치로 꾸스꼬에 있는 모든 왕족을 죽일것을 명한다.
내쳐 잉카의 수도를 꾸스꼬에서 끼또로 옮길 구상을 한다.

이제 잉카의 유일한 왕이 된 13대 황제 아따왈빠...



177명 대 5만 명
잉카의 내전에서 아따왈빠가 승리를 거둔 그 즈음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꼬 삐싸로가 177명의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뻬루 북부 해안도시인 뚬베스에 상륙한다.

뚬베스에서 남쪽 해안도시인 삐우라를 거쳐서 잉카왕이 있다는 까하마르까를 향해 진군을 하는데

그 군사의 수는 177명에 불과했다.



반면 까하마르까에 진을 치고 있던 아따왈빠의 군사는 5만 명 정도로 추정이 되는데 잘 발달된 잉카의도로망을

이용한 전령의 보고로 낯선 자들이 해안에 상륙하고 까하마르까를 향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아따왈빠는 측근을 보내 그들의 동정을 살펴서 보고하게 했는데 애초에 이 낯선 177명을 상대로

걱정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와스까르를 물리치고 잉카의 유일한 왕이 된 아따왈빠에겐 
잘 훈련된 5만의 군사가 있는데

불과 177명을 상대로 무슨 걱정을 했을까.
그저 의례적인 보고를 받으면서 
그들의 진군을 막지말고 그냥 두라는 명령을 내리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러

잉카제국 몰락의 단초가 된다.

험준한 안데스의 고산을 오르느라 기진맥진한 스페인 군사들과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손바닥의 손금 보듯이

알고 있는 고산지대의 잉카군사들.  게다가 177명과 5만 명.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제 막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된 아따왈빠가 
이 낯선 자들과 싸울(?) 생각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마침내 까하마르까에 도착한 스페인의 정복자 삐사로와 
그 군사들은 잉카군의 주둔지를 보자 기가 질려버렸다.
셀수도 없이 많은 군막들과 잘 정돈된 주둔지는 자신들이 상상하던 야만족의 군대가 아니었다.

 

삐사로는 최후의 결정을 내려야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77명을 데리고 5만 잉카 군사와 싸운다는 건 죽기를 자초하는 일이고 
렇다고 후퇴를 한다고 해서 잉카인들이

자신들을 그냥 보내줄리도 만무할뿐더러 자신을 따라온 병사들에게 죽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이 병사들은 스페인 왕실의 군대가 아니고 배당을 받기로하고 따라온 사병들인데 몇 년에 걸친 원정이

소득없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이 사병들의 불만을 잠재울 방법이 없었을 테고 또 자금을 대준 로께 신부에게도

원정 성공여부에 관계없이 투자금을 갚기로 이미 약조했던 터라 그냥 돌아가도 결국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판단하에 까하마르까 시내로 들어가기로 결정을 내린다.

삐사로는 아즈떽을 정복한 꼬르테즈가 했던 것처럼 왕을 사로잡을 계획을 세운다.
아따왈빠에게 선물과 함께 특사를 보내 
자신들이 까하마르까에 머물 것과 또 왕이 자신들의 군막에 방문해

줄 것을 청했는데 아따왈빠는 너무나 순순히 그 둘을 다 들어준다.

즉시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한 삐사로로서는 적잖이 실망했지만 치밀한 계획을 세울 시간을 벌게되어 오히려 득이 됐다.
공교롭게도 잉카왕이 지정해준 장소는 삼면이 높은 담으로 막혀있고 
한 방향만 외부와 통할수 있어서

삐사로에게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지가 조성된다.



삼면의 건물 곳곳에 군사를 매복시켜놓고 
안에 들어온 왕의 일행을 총 공격하기로 작전을 세운 삐사로와

그 일행은 긴장과 초조, 불안 속에서 그 밤을 보냈다.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 모두 죽을 운명이므로 
밤새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서 새 날을 맞았다.
 

마침내 아따왈빠는 5천 명의 비무장 잉카군을 이끌고 군막을 방문했고 또 다른 잉카군은 이 군막 밖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원정의 재정 후원자인 로께 신부의 신호를 기화로 매복해있던 스페인 군사들의 총 공세가 시작됐다.

대포와 총을 쏘고 기병들은 말을 타고 나가 미친듯이 닥치는대로 잉카인들을 베고 살륙했다.
저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잉카왕을 사로잡는 거였다.
잉카왕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야만 자신들이 안전하다는 걸
아즈텍을 정복한 꼬르떼즈의 전례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미친듯이 날뛴지 두 시간여, 마침내 잉카왕 아따왈빠를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이 두 시간 남짓 동안 스페인인들이 죽인 잉카인은 무려 7천 명에 달한다.
이 짧은 두 시간만에 잉카와 스페인의 역사가 뒤바뀐다.
밤새 긴장 속에 떨던 스페인 정복자들은 너무나 쉽게 잉카를 정복하고 
이를 계기로 브라질을 제외한

전 남미를 식민통치하게 된다



정복자들간의 갈등
프란시스꼬 삐사로에게는 동업자 알 마그로가 있었는데 
아따왈빠 체포 때 이 알마그로와 그 휘하 군졸은 현장에 없었다.

포로로 잡힌 아따왈빠는 삐사로와 협상을 통해 자기의 몸값으로 막대한 양의 금, 은을 제시했다.
꽈르또 델 레스까떼(Cuarto del rescate),

몸값의 방이라는 의미인데 구금된 아따왈빠가 삐사로에게 그 방 가득 금, 은을 채워주기로 제안하고 

자신을 풀어줄 것을 요구한다.
삐사로 역시 그 조건을 수락하는데 아따왈빠를 살려주고 
그를 어용황제로 대리 통치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거라는 판단때문이었다.

지금도 까하마르까에 남아있는 그 몸값의 방에 금과 은이 속속 도착하고 약속한 양이 거의 다 채워져갈 무렵 

삐사로의 동업자 알 마그로가 150명의 부하와 까하마르까에 도착한다.

그 막대한 양의 황금을 보고 욕심이 생긴 알 마그로도 
그 중에 일부 배당받기를 희망하지만 아따왈빠

체포시 현장에 없었던 알 마그로에게는 그 황금을 주장할 권리가 없었다.
최소한의 공을 세워야만 배당을 주장할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한 
알 마그로와 그 부하는 아따왈빠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아따왈빠가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은밀히 퍼뜨린다. 


알 마그로는 사전에 아따왈빠의 내란 음모를 발각하고 왕을
재판에 회부하여 결국 아타왈빠는 사형에 처해진다.
사전에 내란을 발각하고 그 계획을 무산시킨 공로로 
알마그로와 그 일행에게도 일정량의 배당이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1532년 그렇게 잉카의 마지막 황제 아따왈빠는 두 정복자 간의 이권 다툼에 희생양이 되어 짧은 영화 끝에 생을 마감한다.
더불어 잉카제국도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