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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진관련

공주 메타쉐콰이어길, 고마나루, 한옥마을 - 사진연습

3/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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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사진은

인물만 나오게 찍는건 의미없다. 

야외나 관광지에서 인물만 찍으면 집에서 또는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것과 차이가 없다.

주변을 적절하게 넣어줘야 한다.

 

인물사진의 빛은 사광 또는 역사광이 좋다.

발 아래 공간이 1 이라면, 머리위 공간은 1.5~2  되도록 해야한다

인물의 시선이 향하는 곳의 공간을 2/3 ,  인물의 뒷쪽 여백을 1/3 정도로 한다

 

얼굴을 자를때는 눈썹위 까지 즉 눈썹까지는 나와야한다.

인물사진은 발목, 무릅관절, 허리등에서 자르면 안된다. 

발목과 무릅사이, 무릅과 허리사이, 허리와 목 사이를 잘라야 한다

 

주제가 인물임을 확실하게 해줘야 된다

주변을 적절하게 넣어주는게 좋다.

머리위로 공백이 많으면 사진의 균형이 안맞게된다.

후보정으로 크롭해서 맞출순 있지만, 찍을때부터 구도를 생각하고 찍어야된다.

모델은 본인이 어떻게 나오는지 잘모른다.  따라서 찍는사람이 자세나 포즈등을 요구하고, 수정해야된다

 

 

 

 

 

공주 고마나루
명승 제21호
공주 고마나루는 송산리고분군 서쪽에 있는금강 변과 나루터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인간과 곰에 관한 전설이 전해 오는 명승지이다.
역사속의 고마나루는 곰나루라고도 불렸으며 한자어로는 웅진이라고 하였다. 
신라 신문왕 때는 웅천주라고 하였고 경덕왕때는 응주라고 하였는데 
고려태조 때(940년) 공주로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른다.
고마나루는 백제수도의 주요 통로이자 물길과 물길이 만나는 지점으로 1010년에는고려의 현종,
1624년에는 조선의 인조가 이 나루를 통해 공주에 들어왔다는기록이 있다.
660년에는 나당연합군을 이끈 당나라 장군 소정방(592~667)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금강을 
거슬러 와 자리잡은 주둔지이기도 하다.
현재까지도 고마나루에 금강을 지키는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웅진단터가 남아 있어 
조선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제사 공간이었음을 알 수있다.
고마나루는 금강변 백사장이 있는강언덕과수백여 그루의 소나무 숲, 
굽이치는 금강, 연미산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고마나루 전설 
옛날 연미산에 암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짝이 없어 외로웠던 암곰은 나그네를 발견하고, 그를 동굴로 데려와 남편으로 삼았다.
곰은 먹이를 물어 나르며 나그네를 극진히 보살폈다. 
나그네와 함께 산 지 1년이 지날 무렵 둘사0|에서 곰과 인간을 닮은 새끼가 태어났다.
어느 날 나그네가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한 곰이 문을 열어둔 채 밖으로 나간 사이 
나그네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암곰은 새끼를 보이며 나그네에게 돌아올 것을 애원했지만 나그네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슬픔에 몸부림치던 곰은 마침내 새끼와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웅진단과 수신제
웅진단 제사는처음에는 곰에대한 제사였으나 점차 수신(水神)에 대한 제사로 성격이 변화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 웅진단 제사는 연2회에 걸쳐 다른 산천제와 함께 한 번에 치러졌는데, 
세종실록 에서는 이 제사를 곰신이 아닌 용왕신에 대한 제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곰에 대한제사라고 생각했으며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분의 
증언에 따르면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사람들이 웅진단에서 몽굿을드렸고 
제사상에는 곰이 좋아하는 도토리묵과 마를 올렸다고합니다.
지난 2011년, 인근지역을 발굴조사 한결과 조선시대 웅진단 건물터가 확인되었습니다.

 

곰 사당
금강에 빠져 죽은 암곰과 새끼 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제를 지낸 사당이다. 
앞마당에 있는 웅신 단비에는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적혀 있다. 
1972년에 백제 때의 유물로 추정되는 돌곰이 웅진동에서 출토되어 현재 공주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조선 시대 향교의 대성전을 본떠 소박하게 건축하였으며 야트막한 담장과 
아늑한 솔숲이 어우러져 신묘한 기운을 자아낸다.

 

 

담장등을 찍을때는 한쪽모서리는 여백을 둬야된다.

 

고마나루와 돌곰상
지난 1972년, 송산리 고분군주변 밭에서돌 곰상이 발견되었습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돌곰상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고마나루 솔숲에 조성된 곰사당에도 모형이 있습니다.

돌 곰상의 정확한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유물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신앙적인 의미가 담긴 소품이거나 무덤에 넣기 위해 만들어진 부장품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백제시대의 사비, 즉 현재의 부여에서 흙으로 만든 곰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여 구아리 건물터에서 발견된 흙 곰상의크기와 재료는
돌 곰상과 다르지만 기본적인모양이 비슷하므로 무덤에 넣는부장품, 즉 진묘수로 보기도 합니다.

 

고마나루에 잠든 백제의 숨결
공주의 옛 이름인 고마나루는 곰을 뜻하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고마나루가 큰 마을을 의미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근거는 백제 동성왕 시대에 금강이 넘쳐 200여 호가 물에 잠겼다는 기록과
당나라가 고마나루에 웅진 도독부를 설치했다는 기록,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 고마나루로 옮겨 도읍하였다'라고 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등 여러 기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945년에는 큰장마가 져서 고마나루 일대의 모래가 쓸려 나갔는데,
그 자리에 가로세로로 쌓은 건물의 흔적이 확연히 드러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 기록들을 보면 고마나루는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번화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고마나루에 남아 있는 백제의 숨결은 
오늘날 공주지역이 웅진백제의 중심부였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공주 한옥마을.

(좋은 글)-퍼옴-
우산지목(牛山之木) - 『맹자(孟子)』
“우산(牛山)은 원래 민둥산이 아니었다”
 
전국시대 맹자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인간들은 원래 착하게 태어났다. 
그런데 모진 풍파와 세월이 인간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악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절대로 이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맹자는 자신의 논리를 당시 지도자들에게 설득하기 위하여 우산지목(牛山之木)이라는 고사를 꺼냅니다. 
'우산이란 산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민둥산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 산이 원래부터 민둥산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나무가 울창했으나 대도시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면서 나무를 베어갔다. 
나무를 잃은 우산은 사람들이 안 오는 밤에 이슬을 머금고 부지런히 싹을 틔어내고 풀을 키웠다. 
그러나 이번엔 목동이 소와 양을 끌고 나타나 조금 자란 그 풀마저 모두 뜯어 먹히고 말았다. 
나무도 풀도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된 우산. 그러나 그 산이 원래부터 민둥산은 아니었다.'
 
맹자의 우산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따뜻한 사랑과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산에 도끼가 들어와 나무를 마구 베어던 것처럼 세파의 도끼가 우리의 양심을 찍어댄 것이지요. 
우리들의 마음은 하루하루 황폐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하루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한 저녁이 되면 
찍히고 상처 난 영혼을 다시 추스르곤 합니다.
 
우산지목 상미의(牛山之木 嘗美矣) : 우산의 나무는 일찍이 아름다웠다.
 
우리는 아무리 힘든 세상을 살고 어떤 포악한 행동을 보더라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맹자의 이런 날카로운 외침 뒤에는 마지막가지 포기하지 않았던 인간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선함에 대한 믿음과 신뢰 말입니다. 
그것이 인간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시선입니다.
 
"세상에 아름답게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