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19
귀연산악회 지리산 오리정골 - 비리내골 산행참가
귀연산악회 카페에 넘 잘 작성된 산행후기글이 있기에 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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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오리정골과 비리내골 계곡 산행
산행일 : 2011. 6. 19(일) 날씨 : 맑음 기온 : 섭씨 18~30도 산행거리 : 15km 산행시간 : 8시간 동행 : 귀연산꾼 45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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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신마을 | 09 : 35 | 헬기장 | 15 : 18 |
오리정골 입구 | 10 : 00 | 비리내골 상류 | 16 : 45 |
점심 | 12 : 20 | 계곡 알탕 | 17 : 00 |
계곡 끝자락 | 14 : 30 | 삼림목장 | 17 : 30 |
구벽소령 | 15 : 00 | 삼정마을 | 17 : 55 |
<우리가 천천히 오래 걷는다는 것은>
강원도 산길 가운데 좀 가파른 곳은 힘들지 말라고 길이 지그재그로 나 있습니다.
이런 길은 당연히 모양 따라 천천히 걸어야 하는데 힘들다고 불평하면서도
길이 난 대로 걷지 않고 직선으로 올라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평평한 들길이든 산길이든 자동차를 버리고 걷는 것은 단순한 운동만이 아니라
길을 걸을 때라도 좀 천천히 여유롭게 생각하자는 것인데 우리는 숲속에서 아이들과 걸을 때도,
나무와 함께 걸을 때도 무의식중에 ‘빨리빨리’ 습관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산속에 짐승들이 낸 길을 봐도 황급히 쫒길 때 말고는 대부분 산허리를 빌 둘러 갑니다.
새들도 바로 둥지로 날아가는 법 없이 이곳저곳 옮겨 앉다가 둥지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무엇에도 거칠 것이 없어서인지 사람들만 지름길로 가려고 합니다.
말로는 자연을 만끽하러 왔다지만 들길을 걸을 때도
뭐가 그리 급한지 멀리서 바라보며 걸어야 할 풍경 속의 들판을 직선 본능을 발휘해 가로지릅니다.
- 중략 -
우리가 자동차를 버리고 걷는 것은 천천히 여유를 즐기는 한편 내 발로 걸어가며
인내와 끈기를 배우는 일이 아니겠는지요.
정작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새소리와 물소리만 들리는 호젓한 산길을 걸으면서 짜증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라보는 자연 풍경은 참 여유로운데 실제 산길을 걷는 동안 때로는 숨이 차고 힘드니
“나는 여유로움을 즐길 모든 준비를 하고 떠나왔는데, 길이 힘들어 내가 힘들다.”라고 짜증을 내곤 합니다.
걷는 것은 평지든 산길이든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보다 힘든 일이지요.
평지든 산길이든 쉬운 트레킹은 없습니다.
오래 걷는다는 것은 의지력을 키우는 것만이 아니라 사고의 인내력도 기르는 일이 나닐까 싶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쾌적하게 걷는 것만이 좋은 트레킹이 아니라,
의지와 사고의 인내력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길이 나에게 가장 좋은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강원도 바우길 뿐 아니라 전국의 걷기 좋은 길이 정말 많습니다.
올여름 아름다운 산하를 걷는 분 모두 안전하고 또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좋은 생각 7월호 소설가 이순원님 글 중에서>
<오리정골 입구에서 단체 사진>
<청학의 전설이 깃든 지리산 의신마을>
지리산에는 산과 더불어 살아 숨 쉬는 수많은 마을이 있다.
그 중 의신마을은 섬진강과 지리산의 물이 만나는 화개에서 화개천을 따라 깊숙이 거슬러 올라가면 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지리산과 지리산의 삼신동(청학동)에 얽힌 전설이 깃들어 있는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리산의 양지바른 기슭에 자리 잡은 의신마을은 산간오지이면서도
예로부터 비교적 양호한 지리적 여건 탓에 온갖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곳이기도 하다.
남서쪽으로는 남해 바다와 섬진강의 물길을 끼고 있는가 하면 북동쪽으로는 삼남 지방의 대로였던 벽소령을 끼고 있는 요충지인 셈이다.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을 연결하는 지리적 여건으로 의신마을은 깊은 산 속의 마을이면서도 수많은 시련을 겪었으며 그로 인해 마을의 한자 지명이 바뀌기도 했다.
의신마을은 원래 한자로 “依神” 또는 “義神”이었으나 경술국치 이후 의병활동 근거지로 재난을 입게 되자 “神” 대신 “信”을 사용해 지금은 “義信”마을로 고쳐 쓰고 있다.
원래 의신마을의 “神”자 유래는 지리산의 삼신동 개념에서 비롯됐다.
의신마을 4km 아래에 있는 “神興”과 덕평봉 일원의 “靈神”등 “神”자가 든 세 곳을 삼신동으로 풀이했던 것이다.
삼신동이란 개념은 신라 정강왕 첫해(886년) 이곳을 찾았던 최치원선생이 이들 마을이 있는 일대를 신선들이 살 만한 곳이라 해 신흥동마을 입구에 “삼신동”이란 각자를 친필로 새겨 넣은 데서 비롯되고 있다.
의신마을은 1950년 전란을 전후해 지리산에 은거하던 빨치산과 토벌대가 격렬하게 교전한 현장이기도 하다.
의신마을 위의 빗점골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유명하며
인근의 대성골은 빨치산이 몰살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모두 의신마을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과 토벌대의 교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의신마을 사람들 중 당시 사상이나 이념에 물들거나 심한 피해를 당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은 의신마을의 터가 좋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첫 폭포>
<3단 폭포>
<이끼폭포>
<오리정골>
지리산은 그 규모가 큰 만큼 골짜기와 지능선도 수 없이 많으며 모두가 길고 깊다. 이 많은 골짜기와 능선에 대한 신비를 체험하려는 산악마니아(mania)들이 탐방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공원관리공단측에서 탐방을 통제하고 있어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일명 빨치산 등정이라고 이름 붙여 답사를 한다.
벽소령에서 형제봉을 거쳐 명선봉을 잇는 지리산 주능선의 남쪽자락(의신방향)에 몇 개의 골짜기(덕평골, 오리정골, 절골, 산태골)가 있는데, 이 골짜기는 현지인들 외에는 사람발길이 없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오리정골과 산태골은 특히 외부인의 발길이 정말로 없는 곳이다. 고로쇠물 채취 흔적 외에는 전혀 탐방객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또 산태골(삼태골)은 비탈면이 매우 험준하여 짐승도 다니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오리정골은 형제봉(1433m)에 이어지고, 산태골은 명선봉(1586m)에 이어진다. 따라서 산태골로 오르는 비탈면이 더 많이 가파르고 험준하다.
오리정골은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에는 의신이나 신흥보다고 아주 큰 마을이었으며, 지리산의 남북을 잇는 교통로 상에 있었다.
오리촌이 큰 마을이었다는 것은 지금 남아있는 옛길의 크기나 완만하고도 넓은 골짝의 지형으로 미루어 짐작을 할 수도 있다. 지도에는 덕평골로 표기되어 있다.
<폭포와 소>
<양폭?>
<오리정골 중턱>
<계곡의 아래쪽 모습>
<무명 폭포>
<이끼 폭포>
<힘찬 폭포 모습>
<백합나무 꽃>
<지리주능-벽소령 쪽>
<구 벽소령>
<벽소령>
달밤이면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희고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고 하여 예부터 벽소령이라 불렀다고 한다. 벽소령의 달은 지리산 10경 중 하나이다.
벽소령 작전도로는 1969~1972 10월까지 공사기간을 걸쳐 만들어진 도로로써 무장공비들의 은신처나 거점으로 기능할 것을 방지한다는 군사적 요구에서 비롯된 도로인데 30년 이상을 넘게 방치해 두고 있다.
벽소령 작전도로는 지리산이 또 다시 빨치산들의 은신처나 거점으로 기능할 것을 방지한다는 군사적 요구에서 50년대 후반에 건설된 도로이다. 지금은 북쪽 음정마을에서 벽소령 대피소 300m 앞 까지는 차량이 접근할 수 있으나 공원 관리차량만 통행이 가능하며, 벽소령 능선과 남쪽에서 삼정마을 까지 도로는 바윗돌이 무너져 내리고 잡목이 우거져 더 이상 차량통행은 할 수 없다.
<벽소령 하늘>
<오리정골 긴 계곡 모습>
<벽소령 헬기장에서>
<비리내골 상류쪽에서>
<비리내 계곡>
<비리내계곡 각자>
<비리내 계곡의 유래>
옛날 인걸과 홀어미가 살았는데, 어느 날 옥황상제의 진지상을 차리러 내려온 선녀들이 더위를 못 참고 목욕하는 것을 보고 인걸이 훔쳐 아미란 선녀가 하늘로 가지 못하고 인걸과 함께 살았는데 자식을 낳고 살던 아미는 인걸이 장난삼아 입힌 선녀 옷을 입고 하늘로 간후 돌아오지 않았고 인걸과 자식들은 아미를 기다리다 지쳐 죽고 말았다.
후인들은 어미가 날아서 떠났다고 해 비리내계곡(飛離嬭溪谷)이라 전하고 있다.
<비리내계곡 - 멀리 지리산 형제봉이 보인다>
<삼정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