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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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수정봉 - 고남산구간 (59구간중 4구간)
당산제단뒤로 노송이 우월한 자태를 뽐내고,
그노송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촬영에 바쁜모습입니다.
오늘은 설경과 눈꽃등을 제대로 볼수있는 복받은날입니다....ㅎ
햇빛이 있는 낮시간에는 눈들이 녹는데, 이른 아침에 날씨마저 추워서 눈꽃이 그대로 남아...장관을 연출합니다.
여원재.
고남산 정상에서 보이는 풍경.
탁트인 조망이 일망무제 입니다.
운봉들녁과 운무에 쌓인 바래봉 풍경
산을 오르는 모든 길은 오름과 내림의 연속이다.
아무리 높은 산이라 할지라도 저 홀로 곧추선 게 아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수많은 봉우리들이 어깨를 겯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하나의 산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등산과 하산은 동의어이기도 하다.
< 서오릉 & 송년파티 >
곱게 길을 낸 산책길.
눈이 적게내려서 눈사람도 작은건가?
그렇지만 귀엽다...ㅎ
좌측이 의상봉.
우측이 용출봉입니다.
원효봉에서 북한산의 가장 멋진 조망을 볼수 있습니다.
난로에서 나온 숯으로 목삼겹살을 구웠지요.
화이팅도 하면서 송년의 밤이 깊어갑니다.
< 인터넷 검색자료 >
사적 제198호. 5릉은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을 일컫는다.
1457년(세조 3) 세자 장(璋:뒤에 덕종으로 추존됨)이 죽자 이곳에 안장(경릉)한 이래
1470년(성종 1) 덕종의 아우인 예종과 그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
1681년(숙종 7)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
1721년(경종 1) 숙종과 그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와 제2계비인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
1757년(영조 33)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이 들어서 능의 무리를 이루었다.
그밖에 이곳에는 명종의 큰아들인 순회세자의 순창원(順昌園)이 경내에 있으며,
1970년에 숙종의 후궁인 희빈장씨의 대빈묘(大嬪墓)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경릉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왕의 것이 오른쪽에, 왕비의 것이 왼쪽에 조성되지만
이것은 반대로 왕릉이 왼쪽에, 왕비릉이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형식이다.
추존왕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왕릉에 나타나고 있는 난간석이나 망주석, 석수 등의 호위가 없다.
반면 왕비릉은 생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제도에 따라 구색을 갖추었으며, 난간석의 기둥은 창릉의 형식을 따랐으므로 특이하다.
창릉도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즉 상석을 받친 석족(石足)은 일반적으로 4개의 양각 귀면이지만
창릉은 문고리 모양을 조각했으므로 북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
또 난간석의 기둥머리는 연잎과 연주문(連珠紋)이 보편적이지만,
창릉의 큰 석주는 둥근머리 밑에 환상받침을 마련하고 사각 석주로 변천되어가는 형식을 하고 있어
당시 일부 남아 있던 고려 왕릉의 석주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명릉은 조선 능제의 분수령이 되는 것으로서 그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석물의 치수를 실물에 가깝게 했으며 부장품의 수량도 감소했다.
둘째, 문인석의 미소와 무인석의 늘어진 투구와 이마에 새긴 투구의 파상선 등은 1649년에 조영된 장릉 석인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셋째, 8각의 장명등, 옥개를 4각형으로 제도화했다.
그리고 익릉은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 제도를 따르고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홍릉은 명릉보다 20일 늦게 조성했으므로 상설제도나 석물양식은 거의 비슷하다.
가령 문인석은 용모나 복식상태 등에 있어서 그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한 특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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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종 야사 >
조선조 제8대 임금 예종(1450~1469)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 형 의경세자가 20세로 갑자기 죽자 9세에 세자로 책봉된다.
세조가 죽기 하루 전날인 1468년 9월 7일 전위 받아 18세로 왕위에 올라 1년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재위해 남긴일은 별로 없다.
류자광의 모함을 받아 장래가 촉망되는 남이장군을 죽인것 말고는 정말 한일이 없었다.
예종은 세자일 때 세자빈인 장순왕후 (영의정 한명회의 3째딸)와 결혼하여 1461년에 인성대군을 낳았는데
이때 나이가 12살이였고 세자빈은 17세였다. 장순왕후는 산후병으로 일찍죽고 인성대군도 4살때 죽는다.
그러니까 12살에 예종은 아기를 낳을 정도로 조숙하고 정기가 왕성하였다.요사히 나이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 쯤 되는 나이다.
그 후 예종은 우의정 한백륜의 딸을 세자빈으로 책봉하였으니 그녀가 인순왕후 한씨이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제안대군과 현숙공주가 이었으나 제안대군은 예종이 죽을때 4살이여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형인 의경세자의 둘째아들 자을산군-후일 성종이며 한명회의 4째 딸과 결혼 함- 이 왕위를 있는다.
야사에 따르면 예종은 안순왕후 한씨와 잠자리를 하다가 갑자기 죽었다고 한다.이른바 복상사(腹上死)인 것이다.
안순왕후는 자기의 몸 위에 엎드린 용체가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여 하반신을 옆으로 빼내니 용체가 힘없이 요 위로 무너져 내렸다.
이에 안순왕후는 그만 혼절해 버렸다고 한다.
예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 정순왕후 윤씨는 기가 막혔다. 12년 전에 맏아들 의경세자가 갑자기 죽고 이어
남편인세조도 죽었는데,1년 만에 또 다시 아들이 급사하자 눈앞이 캄캄했다.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황후나 후궁들과 잠자리에 들었다는 중국 한무제, 가마를 타고 가면서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여색을 가까이 했다는 진무제, 수 십명의 궁녀들과 밤낮 술래잡기를 했다는 수양제 등은 색을 유난히 밝혔던 음탕한 군주들이 였다.
그런데 여색을 밝혔다는 기록도 없는 예종에게 복상사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가 12살에 아기를 낳아서 일까? 아니면 아마도 급사(急死)라는 것이 와전되거나 덧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말 그대로 야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복상사 : 상대의 배 위에서 죽는 것... 속어(俗語)로 쾌락사(快樂死),·극락사(極樂死), 애정사(愛情死), 방사사(房事死)로 부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색풍(色風)'이라고 하여 성교 중에 사망한 경우를 '상마풍(上馬風)', 성교 후 사망을 '하마풍(下馬風)'이라고 불렀다
< 대청호 오백리길 13구간 (한반도길) >
된비알도 오르고, 적당한 내림길도 있는 능선길이 이어진다.
(참고로, 독락정에서 호반길을 따라 약 2km 진행하면 첫번째 이정표인 고성삼거리가 나오는데, 원래 오백리길은 이곳에서 1.3km 정도 더가서 금정골 삼거리에서
둔주봉으로 올라가야 되는데, 선두가 첫 이정표인 고성삼거리에서 등주봉으로 올랐습니다. - 이 코스(고성삼거리)에서 둔주봉을 오르는게 거리도 멀고 오르내림이 있어 힘들지만,
대신 조망은 좀더 좋은곳입니다.)
정상에서 약 20분정도 내려서면 정자가 있고
그곳에서 한반도 지형이 보입니다. 이 풍경때문에 13구간이 한반도길로 명명 되었지요.
조망처에서 본 산능선의 실루엣....
대청호와 마을과 임도길이, 산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경은...
발걸음은 가볍게 합니다.
12월의 엽서 - 이해인
또 한 해가 가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한 해 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카드 한 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지요
해야 할 일 곧잘 미루고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남에게 마음 닫아 걸었던
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 합니다
같은 잘못 되풀이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밖엔 없는 것처럼
시간을 아껴쓰고
모든 이를 용서하면
그것 자체로 행복할 텐데......
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할 것
너무 많아 멀미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주십시오
12월엔 묵은 달력 떼어내고
새 달력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
나를 키우는 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 백두대간 육십령 ~ 서봉 구간 ( 59구간중 9구간) >
출발은 힘차게...했는데
황홀한 설경은 능선길내내 계속이어지고
바람은 점점 매서워진다.
눈 쌓인게 실감나는 풍경입니다.
덕유산 능선길과 무룡산의 설경이 그림같은 풍경으로 다가옵니다.
무룡산만 당겨봅니다.- 능선 좌측끝으로 희미하게 삿갓재 대피소도 보이네요.
백두대간 또한 크고 작은 산들로 이어지는 이 땅의 으뜸되는 산줄기이다.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도상거리 약 1,625km)
이 땅의 등뼈를 이루는 산줄기, 그것이 바로 백두대간이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금강산, 설악산, 점봉산,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과 같은
대부분의 명산들이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 보문산 임도 둘레길 >
아직 가로수로 심어논 나무는 보잘것없지만....어느순간 거목으로 커 나갈것입니다.
임도길 저넘어로 산그리메가 펼쳐지고....
이런저런 인생사를 이야기하면서 걷다보니....식장산이 보이는게
남향을 지나 동향쪽으로 들어섰네요. 식장산을 배경으로 한장.
우측뒤로 서대산이 보이네요.
임도길을 버리고 산위로 올라서면서 터지는 조망을 즐기면서 오르다 보니 어느새 보문산성까지 올라왔네요.
대전시내를 파노라마로 촬영해봅니다.
충남대병원으로 내려서는 끝부분 골목길.
< 영동 천태산 >
옥새봉 정상.
높이는 490m.
이곳 옥새봉에서 능선을 따라 걸으면 금강변에 갈기산과 마주보는
부엉산이나 자지산으로 진행이 가능할듯하고....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코스를 잡고 걸어보고 싶다.
< 대청호 오백리길 9,10구간 일부분 >
대청호 안내지기겸 체조진행을 맞고있는 단비님.
지난 1년간 수고 많았습니다~~
시와 어울리는 벽화도 있고...
정지용 문학상 시비도 있습니다.
대청호를 배경으로 이겨울에 어울리는 시한편 읽고 갑니다.
겨울 노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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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 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 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暴雪)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난(蘭)을 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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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
멋진풍경을 담는 모습도 보기좋고....
호수 - 정지용 -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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